분권형 대통령제란 지역이나 국민이 아니라 중앙 위정자들 간 분권
계엄이 통치행위라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윤석열의 주장은 유신헌법에 기초
‘소수의 전제정치’는 다수가 소수의 반대를 짓밟는 것보다 더 큰 문제
이재명과 윤석열이 똑같이 국민이 주인이라고 해
세모(歲暮)에 여의도 한 식당에서 대한민국 헌정회(전직 국회의원 모임) 주체로 초청 긴급 간담회가 열렸다고 한다. 여야 원로들이 윤 탄핵 이후에 대비하여, 이른바 분권형 권력구조 개헌 마무리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고, 여기에 전직 총리 이낙연, 전 국회의장 김진표 등이 참석했다.(연합 뉴스 2024.12.31.)
국회 부의장 주호영은 개헌 논의를 촉구하며, “성공할 수 없는 권력구조, 대통령제 개선해야 한다”, “정치권 '대오각성' 갈등과 분열 종식해야… 87년 체제, 대통령제 유통기한 지났다”, “자신의 정치 스케줄이나 이익에 사로잡혀서 개헌을 거부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 “누가 나쁜 사람인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등 발언을 했다고 한다.(매일신문, 2025.1.2.)
윤석열 탄핵정국을 맞아 빈발하는 개헌 담론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낡은 것, 성공할 수 없는 권력구조로 규정하고, ‘분권형’ 대통령제, (책임)총리제, 의원내각제 등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때 ‘분권형’이란 지역분권이나 국민 민중으로의 분권이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국회에서 뽑거나 추천하는 총리에게로 나누어주자는 것이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윤석열을 기폭제로 점화된 논의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이다. 일각에선 윤 대통령 개인에게서 이유를 찾고, 다른 측에선 '제왕적 대통령제'로 평가받는 '5년 단임 대통령제'에 눈을 돌린다고 한다. 한쪽은 "물러가라"고 외치고, 다른 쪽은 "헌법을 바꾸자"고 주장한다는 것이다.(한국일보, 2025.1.1.)
그런데 “물러가라”와 “헌법을 바꾸자”고 하는 두 가지 이질적 방향에 대한 한국일보의 논설은 각각의 모든 사안에 대해 한계가 있다. 첫째, 사람을 “물러가라”고 할 때, 윤석열만 물러가서 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윤석열 혼자서 이 같은 질곡의 정치판을 짠 것이 아니었고, 거기에는 국힘당의 필요와 기획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윤석열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것이 국힘당이었고, 그 국힘당은 윤석열과 김건희의 범죄 전과의 흔적 및 개연성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윤석열을 영입하고 대통령으로 내세운 것은 이재명에 맞설 마땅한 대항마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힘당은 민주당과 이재명에게 권력을 넘기기가 싫었고, 다소간 함량미달인 줄을 알면서도 윤석열을 띄웠고, 그래서 다소간에 양두구육 했다. 그렇다면, 윤석열에게만 책임을 씌우고, 윤석열만 몰러가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윤석열 이전에 근원적인 책임은 국힘당에게로 환원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제도로서 “헌법을 바꾸자”고 하는데,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현재 중차대한 대통령 탄핵 국면에 직면해서도, 그보다 개헌을 앞세우는 것은 그 또한 권력욕에서 비롯한다. 권력을 국민 민중이 아닌 국회 위정자들이 전유하려는 것이다.
1987년 헌법을 개정하긴 해야겠는데, 여기서 국회 위정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혹여 유신독재 헌법의 틀이 깨지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혹여 유신헌법 이전에 국민 민중이 보유하고 있던 국민 발안, 투표(대의자 선출만이 아니라, 사안에 대한 직접 결정권), 소환권 등을 국민이 내놓으라고 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헌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수정하는 ‘분권’이라고 하고, 그 분권은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에게로 나누어주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이는 총리를 국회에서 선출하거나 추천하므로 국회 중심의 정치, 즉 의원내각제와 연관된다. 그 의원내각제는 의회가 행정부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삼권분립의 체제를 허물자는 뜻이다. 의원내각제, 총리제 개헌을 주창하는 이들은 지역분권이나 국민 민중의 정치적 발언권 따위는 아예 안전에 없다.
의원내각제 주창의 인물들의 예를 소개하면, 윤석열, 권성동(국힘당 원내대표), 주호영(국힘당 출신 국회 부의장), 김진표(민주당 출신 전 국회의장), 우원식(민주당 출신 현 국회의장), 김두관(전 민주당 양산을구 의원) 등이다. 여야를 막론한다.
이들이 ‘제왕적’ 대통령제를 빌미로, 또 대통령이 3번째 탄핵되었다는 사실, 대통령제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고 낡았다는 주장 등을 들어, 대통령의 권한을 국회, 혹은 총리에게로 분권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구실들은 다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들이다. 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나누어 받으면 뭐가 달라지나?
아니다. 총리 한덕수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더니, 대통령 윤석열 복사판 같았다. 지금 대대행(대행의 대행) 최상목도 현재로서 그 같은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회자하는 바에 의하면, 공수처가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 체포 영장을 들고 갔더니, 그것을 막기 위해 경찰병력을 더 보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하기 때문이다. 초록은 동색이라, 대통령과 총리, 국힘당이 그 나물에 그 밥 같다.
대통령제는 이제는 낡아서 수정해야 한다는 말도 타당한 것이 아니다. 1987년 직선의 대통령제 실현과 함께 의원내각제 개헌론이 같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 들어선 김대중 정권은 김종필과 김대중의 연합(DJP)에 의해 창출된 것이었는데, 그때 양자는 의원내각제 개헌 추진에 합의한 것으로 전한다. 결국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당시 의원내각제 논의는 중단되었다. 위정자들의 의원내각제 획책은, 현 윤석열 정부의 질곡과 무관하게, 노무현, 박근혜가 탄핵되기 이전부터 이미 연연히 맥을 이어 내려온 것이다.
한편, 여의도 위정자들을 다소간 한통속으로 놓고 본다면, 윤석열과 이재명은 닮은 점이 있다. 둘 다 국민이 주인이라고 한 점이다. 이재명은 국회의 윤석열 탄핵 결의에 앞서, 또 그 전에도 수차례, “정치는 정치가가 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국민이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번 공조본에 의한 윤석열 체포 시도 과정에서 윤석열 명의의 글이 회자했는데, 거기에도 “국가나 당이 주인이 아니라 국민 한 분 한 분이 주인인 자유민주주의는 반드시 승리한다”고 적혔디.
이재명과 윤석열이 국민을 주인이라고 내세우거나, 실제로 국민이 정치를 한다고 본 점에서 닮았다. 닮은 점은 그뿐 아니라, 또 있다. 그것은 국민이 주인이라고 하면서도, 둘 다 국민에게 결정권을 주려는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둘 다 국민의 뜻, 혹은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들먹거리지만, 정작 그 국민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하는 것이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여론조사 결과에 편승하여 가정한다고 할 때, 이재명 편을 드는 국민이 윤석열 쪽보다 더 수가 많다고 하자. 그렇다 해도 이재명의 ‘국민’에는 상대적 소수의 국민이 빠져 있다. 반면, 윤석열의 ‘국민’에는 상대적 다수가 빠져 소외되고 있다.
이렇듯, 양쪽에서 인용하는 ‘국민’은 전체가 아니라, 다소간에 일부를 지칭한다. ‘국민’이 아전인수의 공허한 수사(修辭), 실속 없는 허깨비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다수와 소수의 국민 중 어느 쪽이 우세하는가 하는 것은, 말의 논리가 아니라, 이재명과 윤석열 중 누가 힘을 얻는가 하는 데 달린 것이 된다. 말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힘의 논리로 판가름 나는 것이다.
또 법원이 발부한 한남동 대통령 관저 체포영장 및 압수수색 영장을 거부하면서, 윤석열 측이 내세운 논리는, “공수처가 내란을 수사할 권한이 없다”, “권한 없는 공수처에 체포 영장을 불법으로 발부한 법원 판사는 징계받아야 한다” 등이다. 국회 탄핵으로 업무 중지 상태에 있는 윤석열이 법원의 판결에 불복하고, 경호처 등의 무력을 방패삼아 영장 집행에 불응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양측 중 누가 더 합리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건은 실제적 힘의 행사에 있음을 보게 된다. 한편에 영장 집행 측의 공권력 혹은 체포 의지, 다른 한편에 피의자 윤석열 측의 경호처 등 물리적 방어력이 그것이다. 전자가 국민 다수의 뜻에 부응한 것이고, 후자가 상대적으로 소수의 뜻에 편승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 것은, 적어도 윤석열 측에서는, 크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윤석열은 한 사람의 지지가 있다해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할 것이라는 취지의 독선적 철학을 종종 피력해왔기 때문이다.
또 윤석열 측은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40쪽짜리 답변서에서, “계엄령 없던 일로 치자”, “계엄으로 생명과 신체 등 국민의 기본권의 침해가 전혀 없었다”,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 청구를 각하 또는 기각해야 한다”, “비상계엄 선포 이전으로 모든 것이 회복돼 보호 이익이 없어졌으므로 헌법 재판소의 심판 필요성이 없다”, “비상계엄을 판단할 권한이 오로지 대통령에게 있으며, 이것은 대통령의 통치행위라 사법판단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그러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장영수는, “회복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결과적) 의미 문제인데, 결국 위헌적인 (비상계엄) 행위를 한 것 자체에 대한 책임 및 중대성의 문제가 있으므로, (비상계엄 행위가) 탄핵 소추의 사유조차 되지 않는다고 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답변을 내놨다.(JTBC, 2025.1.3.)
또 “계엄이 통치행위라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윤석열의 주장은, 정치학 박사 이철희(20대 국회의원,)에 따르면, 유신헌법에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독재 유신헌법에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권(53조 4항: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국회해산권(59조) 등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이 허용됐다는 것이다.
윤석열은 이번 계엄에서 경제부총리에게 문서로 전한 지시사항에 “국회 운영비를 끊고 비상계엄 입법부 예산을 짜라”고 하면서, 국회를 해산하려 했다. 국회 대신 박정희 5·16쿠데타 이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전두환 12·12쿠데타 후의 국보위 입법회의 같은 무소불위의 입법 대행기구를 만들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헌정을 중단시키고 제2의 유신을 시도한 셈이다. “이 계엄·내란이 성공했다면 그가 과연 5년 임기만 채우고 물러나려 했을까”라고 이철희는 묻는다.(한겨레, 2025.1.2.)
같은 이철희에 따르면, 윤석열이나 국힘당의 논리대로라면 소수당, 특히 소수의석을 가진 한 정당이 반대할 경우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으며, 그것은 소수의 지배이다. 이것은 소수의 전제정치(미국의 정치학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 지음, ‘소수의 전제정[Tyranny of the minority]')이다. 소수의 반대 때문에 다수가 교착에 빠진다면 이는 다수가 힘으로 소수의 반대를 짓밟는 것보다 더 큰 문제라고 이철희는 말한다.
윤석열 측의 주장은 이렇듯 논리의 하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남의 심장을 뒤집는 말을 해대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정치구조를 만들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의원내각제, (책임)총리제 등 개헌 담론의 배경이다. 87년 헌법이 유일하게 이룬 대통령 직선제의 의미를 무력화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국회에서 선출 혹은 추천하는 총리에게로 옮기려 하기 때문이다.
목하 전개되고 있는 현상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한덕수, 또 그 대행 대행의 최상목은 소수 국힘당의 입장에 다소간 편승하고 휘둘리고 있다. 최상목이 국회 몫 3인의 헌법재판관 가운데 2명만 임명하고, 나머지 1명은 여야 합의가 없으면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다수에 대한 소수의 지배를 관철하려는 것이다.
여야 합의를 강요하고 다수결을 부정하는 총리의 문제에 있어, 총리를 대통령이 임명하는가 국회에서 선출하는가 하는 것은 본질적인 사항이 아니다. 국회 내에서 소수당이 다수당의 결정을 감히 다수의 독재로 규정하고, 거기에 총리가 편승하면서, 다수당이 발목을 잡히고 있다. 소수당뿐 아니라 다수 민주당 출신인 국회의장 우원식도 걸핏하면, 여야 합의가 없다는 구실로, 의안 본회의 상정을 거부 혹은 연기했고, 전 국회의장 김진표는 그 증상이 더 심했다.
법원의 체포영장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응하지 않으며, 경호처를 동원하여 무력 방어하고, 오히려 법원 판사를 탄핵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윤석열은 말의 논리가 아니라, 소수가 다수 위에 군림하는 힘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윤석열 이후의 정계 판을 의원내각제로 짜려하는 이들은 국민 민중 다수의 뜻, 동시에 그 다수를 대변하는 국회 다수당을 무력화하려는 음모를 집요하게 획책하고 있다. 소수 위정자들의 짬짜미가 횡행하는 국회를 정치의 중심(重心)으로 부상시키려 하기 때문이다.